어느새 내 나이 쉰. 돌이켜보면 나는 늘 공동체 안에서의 역할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가족을 챙기고, 친구에게 충실하며, 직장에서 책임을 다하고, 교회에서는 신자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그 모든 위치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해 왔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나 자신’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었다. 마치 거울 앞에 매일 서 있으면서도 나의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나를 좋아할 수 있을까」 이 책을 펼쳐든 건,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다 문득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떠오른 날이었다. 발달장애인 복지사로서의 일상 속에서 타인을 돌보는 일은 익숙하지만, 내가 나를 돌보는 데는 여전히 서툴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였다.
타인의 기대 속에서 잃어버린 자존감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나에게. 그리고 나의 내면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해 온 시간들에 대해서. 이영희 작가는 자존감을 ‘자기 자신을 수용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이 문장이 참 많이 아팠다. 나는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늘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썼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보다,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괜찮은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 ‘따뜻한 사람’의 이미지를 유지하려 노력했고, 그만큼 피곤해졌다.
나는 늘 열심히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그 삶은 ‘나답게’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책 속에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야 비로소 나를 마주할 수 있다’는 구절을 읽으며, 나는 고개를 떨궜다. 나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은 많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나는 ‘진짜 나’를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다. 책을 덮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나를 이해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싶었다.
감정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 변화
책 속에서 가장 오래 머물게 했던 부분은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 자존감 회복의 시작이라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종종 슬픔, 외로움, 분노 같은 감정을 나약함으로 취급한다. 나 역시 그랬다. ‘복지사’로서 내 감정은 뒷전이 되어야 할 때가 많았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되, 내 아픔은 감추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런 내게 “지금 느끼는 그대로의 감정을 인정하라”는 말은 낯설고도 따뜻했다.
이영희 작가는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오히려 그 감정들과 대화를 나누라고 말한다. “오늘 슬펐구나”, “화가 많이 났구나”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자존감은 자라난다고. 나는 그 말을 믿고 요즘 작은 습관 하나를 시작했다. 일기장에 하루에 한 줄씩 내 감정을 적는 것이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한 줄 한 줄 쌓이다 보니 어느새 나와 나 사이에 작은 대화가 생겼다. 그 안에서 나는 내가 어떤 감정을 자주 느끼는지, 어떤 상황에 취약한지를 조금씩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나를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순간이 생겼다. 이 ‘괜찮아’라는 말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내면아이를 마주하며 시작된 치유
책에서 ‘내면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나는 손을 멈추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내가 내 안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 복지사로서 많은 아이들을 만나지만, 정작 내 안의 아이는 외면한 채 살아왔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내 어린 시절은 감정 표현이 서툰 부모님 아래에서 조용히 눈치를 보며 자라는 시기였다. 내 감정은 늘 ‘참아야 하는 것’이었고, 나는 그걸 너무 일찍 배워버렸다.
이영희 작가는 내면 아이를 위로하라고 말한다. “그때 너는 정말 힘들었겠다”라고 말해주는 것, 그 말 한마디가 어쩌면 50년 넘게 살아온 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나는 그 문장 앞에서 울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안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부모님이 바쁘셔서 홀로 집을 지켰던 날들, 학교에서 친구와 싸우고도 말 한마디 못했던 순간들, 괜찮은 척하던 그 날들. 나는 그 아이에게 “이제 알 것 같아. 네가 얼마나 외로웠는지”라고 속으로 말했다.
책이 제시하는 여러 실천 방법 중, 나는 ‘내 안의 아이에게 편지 쓰기’를 시도했다. 처음엔 막막했지만, 한두 줄 쓰다 보니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마치 내가 나에게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이었다. 복지사로서 늘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내가,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결론: 자기이해로 향하는 자존감 여정의 출발점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어느 정도의 후련함과 동시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마치 커튼을 걷고 오랫동안 닫혀 있던 창을 열었을 때처럼. 『나는 나를 좋아할 수 있을까』는 단순히 자존감에 대한 조언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다시 마주하게 하는 질문으로 가득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나를 이해하는 일이, 그리고 나를 좋아하게 되는 일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건 어쩌면 평생 동안 이어질 여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여정을 시작하게 해 준 책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나도 나를 사랑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싹텄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조금씩 내 감정을 들여다보고, 내 안의 아이를 달래며, 내 일상에 ‘나’라는 존재를 조금 더 중심에 놓아보려 한다. 누군가 내게 “자존감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힘. 그리고 그 힘을 믿고 다시 나를 살아가는 것.” 이 책은 그 여정을 시작하기에 충분한 동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