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일본 기독교 문학의 정수이자, 전 세계 신앙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 종교소설이다. 이 책은 17세기 일본의 혹독한 기독교 박해 시대를 배경으로, 포르투갈 선교사 로드리고 신부가 일본에서 겪는 믿음, 배교, 고통, 하나님의 침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니라,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고통 속에서도 말씀하시는가?’라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특히 중년의 시기를 살아가며 삶의 의미, 고통의 이유,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을 겪고 있다면, 이 작품은 매우 개인적이고 깊은 방식으로 다가올 것이다.
1. 고통받는 이들 앞에서 침묵하는 하나님
책의 핵심 질문은 매우 단순하다. “하나님, 왜 고통받는 사람들 앞에서 침묵하십니까?”
소설 속에서 일본의 기독교 신자들은 가족이 고문당하고 죽어가는 장면을 보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침묵 속에서 기도한다. 그리고 로드리고 신부는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응답이 없음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수없이 기도하며 묻는다.
“주여, 어찌하여 침묵하십니까?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이 절규는 그 시대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도 삶의 위기 앞에서, 기도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말한다.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자리에 계신다고.
2. 배교는 믿음의 부정일까, 사랑의 선택일까?
로드리고 신부는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의 형상이 새겨진 ‘후미에(踏絵)’를 밟아야만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는 발을 내딛는 순간, 자신이 평생 지켜온 믿음을 배반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밟아라. 나는 너에게 밟히기 위해 이 땅에 왔다.”
이 장면은 독자에게 진정한 신앙은 율법적 충성이 아니라 사랑에 기초한 결단이라는 깊은 메시지를 던진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것보다,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과 이념을 내려놓는 것이 더 진실한 사랑일 수 있다는 역설. 이 작품은 바로 그 지점에서 독자의 영혼을 흔든다.
3.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또 다른 말씀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소리로, 기적으로, 변화된 현실로 기대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때로 응답하지 않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진짜 믿음을 선택하게 하신다.
로드리고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사명, 교만, 종교적 자부심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침묵을 “함께 고통을 견디시는 방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 부분은 중년 신앙인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기도 응답이 없을 때, 오히려 하나님이 더 깊이 동행하고 계실 수도 있다.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길 바라는 신뢰의 방식일 수 있다.
4. 신앙의 진실 – 정답보다 관계
『침묵』은 기독교적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잡한 감정과 인간적 고민, 삶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배운다. 신앙은 옳고 그름을 넘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임을. 율법적 판단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태도’가 신앙의 깊이를 결정한다는 것을.
중년의 시기, 그동안 쌓아온 믿음이 삶의 무게 앞에서 흔들릴 때, 이 책은 신앙을 유지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닌, 신앙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5. 독자로서 적용한 묵상의 루틴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다음과 같은 루틴을 만들었다.
- 고통 중 침묵을 묵상하는 시간: 기도 응답이 없을 때에도 5분간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기
- “나는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가?”라는 질문 반복 – 믿음의 본질 점검
- 성경 속 침묵의 장면 기록하기: 욥기, 시편, 예수의 십자가 묵상
이 루틴은 응답 중심 신앙에서 관계 중심 신앙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아도, 나를 절대로 떠나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새롭게 가질 수 있었다.
6. 마무리하며 – 믿음은 침묵을 통과한 사람에게 완성된다
『침묵』은 불편한 책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진짜 신앙은 평온한 삶 속에서가 아니라, 고통과 의심, 침묵을 통과한 자리에서 다져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며 기도 응답이 없던 시절, 그 침묵조차도 나를 성장시키던 시간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오늘도 우리는 묻는다. “하나님,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그때 들려오는 답은 바로 이 책 속의 메시지다.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었다. 네가 울 때, 나도 그 곁에서 울고 있었다.”
『침묵』은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을, 가장 깊은 위로의 말로 바꾸어주는 책이다.